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6세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* 그가 재위하던 시절 [[루스 차르국]]의 [[표트르 1세]]의 후계자 [[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]]가 도망온 일이 있었다. 알렉세이가 카를 6세의 황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여동생 샤를로테와 결혼했기 때문에 카를 6세는 일단 알렉세이를 받아들였고 [[나폴리 왕국]]의 부왕 비리히 필리프 폰 다운[* [[레오폴트 요제프]]의 아버지로 [[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]] 당시 [[토리노 공방전]]에서 [[토리노]] 요새를 지켰다. 전쟁 종결 후 공로를 인정받아 나폴리 부왕으로 임명되었다.]에게 보호를 맡겼으나 표트르 1세가 톨스토이 백작[* [[레프 톨스토이]]의 현조부]을 파견해 알렉세이를 데려갔고 결국 알렉세이는 표트르 1세의 고문을 견디다 못해 사망했다. 이때의 일이 [[트라우마]]로 남았는지 이웃 국가의 왕족을 보호하는데 노력했다. [[프로이센 왕국]] [[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]]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영국으로 망명하려다 붙잡힌 [[프리드리히 대왕|아들]]이 친구의 사형을 목격하고 쓰러지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저런 나약한 놈은 내 아들도 아니라며 죽이려 했다. 당연히 신하들과 왕족들은 뜯어말렸고, 이웃 국가의 군주인 카를 6세도 이 꼴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서 '왕족에 대한 재판은 신성 로마 제국 의회만이 할 수 있다.'라고 근거를 제시하며 만류했다.[* [[프로이센 왕국]]에서 [[프로이센 공국]]은 [[신성 로마 제국]] 권역 밖이었지만, 수도인 [[베를린]]이 위치한 [[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]]과 [[발트해]] 연안의 [[포메른]]은 신성 로마 제국 권역이었기 때문에 프로이센 왕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웠다. 그래서 압박이 가능했던 것이다. 프로이센의 [[호엔촐레른 가문|호엔촐레른 왕가]]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[[7년 전쟁]] 이후 부터였다. 물론 그때에도 형식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구성원으로 남아있었으며,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[[독일 연방]]이 구성된 후에도 오스트리아는 [[보오전쟁]] 전까지는 독일 연방 내에서 프로이센보다 윗서열이었다.] 이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처형을 취소했고 프리드리히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. 결과적으로 카를 6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생명의 은인인 셈. 심지어 프리드리히가 왕세자 자리를 포기하고 딸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고 싶다고 알렸을 때 카를 6세는 사위로 삼으려 할 정도였다. 그런데, 그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와 거의 평생을 싸운 숙적이 된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아이러니. * [[안토니오 비발디]]의 음악을 좋아하여 파산한 그가 곤란해할 때, 카를 6세는 오스트리아 황실 궁정음악가로 받아주려고 했다. 비발디는 기뻐했으나 그만, 카를 6세가 위독해져서 비발디가 애써 와보니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카를 6세가 죽고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]]이 터졌다. 실의에 빠진 비발디는 결국 가난 속에서 사망했다. [[분류:신성 로마 황제]][[분류:독일 국왕]][[분류:오스트리아 대공]][[분류:헝가리 국왕]][[분류:크로아티아 국왕]][[분류:보헤미아 국왕]][[분류:모라비아 변경백]][[분류:사르데냐 국왕]][[분류:나폴리 국왕]][[분류:시칠리아 국왕]][[분류:밀라노 공작]][[분류:부르고뉴 공작]][[분류:브라반트 공작]][[분류:파르마 공작]][[분류:합스부르크 가문]][[분류:1685년 출생]][[분류:1740년 사망]][[분류:빈 출신 인물]][[분류:카푸친 교회 안장자]][[분류:아라곤 국왕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